종시

綾城具氏의 마크

이 심벌마크의 중심부에 있는 원형6개는구(具)자를 상징하며 양쪽 둘레의 월계수 잎 5개씩 10개는 현존하는 10개파를 나타내는 것이고 잎 끝의 꽃망울 2개는 후손이 없는 무후파(无后派)를 나타낸 것이다. 중심부의 작은 원 5개는 삼강오륜을 뜻하며 중앙에 능성(綾城)의 능(綾) 자를 넣었다.

파 명(派 名)
01. 판사파(判事派)           02. 전서파(典書派 /무후)

03. 시랑파(侍郞派)           04. 좌정승파(左政丞派)

05. 판안동파(判安東派)     06. 도원수파(都元帥派)

07. 재신파(宰臣派/재)       08. 낭장파(郎將派)

09. 감무파(監務派)           10. 임천군사파(林川郡事派/무후)

11. 참판파(參判派)           12. 문천군사파(文川郡事派)

⚫능성구씨(綾城具氏) 연원(淵源)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始祖)인 구존유(具存裕) 이전의 구씨(具氏)를 찾아보면 고려(高麗) 태조(太祖) 원년(918년)에 궁예(弓裔)의 태봉국(泰封國) 시중(侍中)이었던 구진(具鎭)이 나주도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에 임명되었고, 후백제(後百濟)의 장군 구도(具道)와 그의 아들 구단서(具端舒)가 있었으며, 고려 숙종(肅宗) 6년(1101년)에 탐라(耽羅=지금의 제주) 성주(星主) 배융부위(陪戎副尉)인 구대(具代)가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임명되었던 사실을 고려사(高麗史)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전고(典考)가 없어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始祖)인 구존유(具存裕)공과 이들과의 관계를 알 수는 없지만 구씨(具氏)가 당시 나주(羅州)나 능성(綾城) 지역의 토착 성씨(姓氏)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능성현(綾城縣) 토성조(土姓條)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능성현(綾城縣) 토성조(土姓條)에도 구씨(具氏)를 능성현(綾城縣)의 대표적인 성씨(姓氏)로 기록하고 있다.

능성구씨(綾城具氏)는 구존유(具存裕)공을 시조(始祖)로 하며 고려 말 조선 초에 활동하였던 7세(世)의 인물들을 파조(派祖)로 하여 판사파(判事派)⋅전서파(典書派-无后)⋅시랑파(侍郞派)⋅좌정승파(左政丞派)⋅판안동파(判安東派)⋅도원수파(都元帥派)⋅재신파(宰臣派-在北)⋅낭장파(郎將派)⋅감무파(監務派)⋅임천군사파(林川郡事派-无后)⋅참판파(叅判派)⋅문천군사파(文川郡事派) 등 12개 파(派)로 분파(分派)하였다. 이 중에서 이북지방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는 하나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전고(典考)를 알 수 없는 재신파(宰臣派)와 후손이 없어 무후(无后)된 전서파(典書派)와 임천군사파(林川郡事派) 등 3개 파(派)를 제외한 9개 파(派)의 후손들이 실존하여 번영하고 있다. ♣ (능성구씨 대종회)

⚫ 시조 : 휘(諱) 존유(存裕)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始祖)는 휘(諱) 구존유(具存裕)이다. 시조공은 고려(高麗) 문괴(文魁=문과 장원)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에 올랐다. 시조공의 배위(配位)는 신안주씨(新安朱氏)이며, 장인(丈人)은 송(宋)나라 사람인 청계(淸溪) 주잠(朱潛)이다.

송(宋)나라가 몽고(蒙古, 뒤에 원나라가 됨)에게 패망하자 주잠(朱潛)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11년(1224년)에 엽공제(葉公濟)⋅진조순(陳祖舜) 등 7학사(學士)와 함께 금성(錦城=지금의 나주)으로 망명해 왔으며 원(元)나라가 이들 망명객을 추적하자 이름을 적덕(積德)이라 고치고 능주(綾州=綾城) 고정리(考亭里)에 숨어 살았다.

시조공(具存裕)은 주잠(朱潛, 호는 淸溪)의 딸과 혼인(婚姻)하여 능성구씨(綾城具氏) 번성(蕃盛)의 기틀을 세웠으며, 주자학으로 유명한 회암(晦庵) 주자(朱子=朱熹)는 시조공의 처고조(妻高祖)가 된다.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始祖)인 구존유(具存裕)의 묘소(墓所)에 대하여 전남 화순군 춘양면 천태산(天台山) 좌측 풍취라대형(風吹羅帶形)이라는 기록은 있으나 실전(失傳)하여 전남 화순군 한천면 정리에 설단(設壇)하고 1979년에 단비(壇碑)를 세웠는데 24대손 구행서(具行書)가 비문(碑文)을 짓고 25대손 구회승(具會升)이 글씨를 썼다.

시사(時祀)는 매년 음력 3월 1일에 세일사(歲一祀)를 봉행(奉行)하고 있다.

⚫ 2세 : 휘(諱) 민첨(民瞻)

시조 할아버님이신 검교상장군공의 외아들로 태어나 고려조에서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목사록참군(全州牧司錄叅軍) 겸 장서기(掌書記)로 있다가 여러번 승진하여 동평장사(同平章事)가 되었으며 배위(配位)는 면천복씨(沔川卜氏)로 봉정대부(奉正大夫) 복윤양(卜允亮)의 따님이시고 고려 개국공신인 무공공(武恭公) 복지겸(卜智謙)의 후손이다.

두 분의 묘소는 전남 화순군 한천면 정리 연주산(連珠山)에 상하봉으로 모셨으며 할머님 묘소가 앞이다. 시사(時祀)는 매년 음력 3월 1일에 세일사(歲一祀)를 봉행(奉行)하고 있다.

⚫ 3세 : 휘(諱) 연(珚)

2세 동평장사공의 외아들로 태어나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면도감판관(安東面都監判官)을 지내셨으며 후에 일곱째 아들이신 휘(諱) 예(藝)공의 귀현으로 정일품인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증직되었다. 배위(配位)는 면천한씨(沔川韓氏)로 평장사(平章事) 자희(子禧)의 따님이고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이신 한사기(韓謝奇)의 손녀이다.

두 분의 묘소는 전북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선동 정승골 구왕봉(具旺峯)아래 상하봉으로 모셨는데 할머님 묘소가 뒤편에 모셔졌다. 시사(時祀)는 2012년도부터 음력 3월 1일에 세일사(歲一祀)를 봉행(奉行)하고 있다.

⚫4세 : 휘(諱) 예(藝)

3세 휘(諱) 연(珚)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공의 일곱째 아드님으로 고려시대 대과시(大科試)인 구재삭시(九齋朔試)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고 그 후 많은 주요관직을 거쳐 중대광판전의시사(重大匡 判典儀寺事)에 오르시고 나라로부터 면주(沔州 : 지금의 당진)를 사향(賜鄕)받았으며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배위(配位)는 아주신씨(鵝州申氏)로 고려조 도염서령(都染署令) 신진승(申晋升)의 따님이요, 태자태사(太子太師) 신영미(申英美)의 손녀요, 문하시중아주군(門下侍中鵝州君) 신익휴(申益休)의 증손녀이다. 묘소는 당진군 송악면 가교리 신암산에 상하봉(上下封)으로 할머님의 묘소는 뒤편에 모셔졌다. 시사(時祀)는 2011년도부터 음력 3월 2일에 세일사(歲一祀)를 봉행하고 있다.

할머님께서는 먼저 돌아가신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묘소국내(墓所局內)에 암자(菴子 :절)를 짓고 천축국(天竺國 : 인도)에서 금동불상(金銅佛像 :1989년/보물987호로 자정됨)을 들여다 모시고 스님을 두어 불공하고 산소를 수호(守護)케 하니 이때부터 이 산을 신암산(申菴山)이라 하였고 이 암자(菴子)를 신암사(申菴寺)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부원군(府院君)의 묘소는 충청서북부지방의 3대명당중의 하나로 지자형(地字形)이라고 하는데, 이 명당을 얻게 된 유래가 전설로 남아 있는 것을 요약하면 부원군께서 사신(使臣)으로 두 차례에 걸쳐 중국(원나라)에 다녀오신 일이 있었는데 도중에 기이하게도 두 번다 같은 사람이 3000량의 공금을 착복한 중죄(重罪)를 짓고 사형을 받게 된 것을 목격하시고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착복한 공금을 갚아주고 그를 구명(求命)한 일이 있었다.그 후 부원군께서는 만년에 벼슬을 사직하시고 사향 받은 면주(지금의 당진)에서 기거하고 계실 때 마침 중국의 심양(瀋陽)벌판에서 구해준 그 중국인이 찾아왔다. 그는 말하기를 그동안 지리공부를 하여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항상 조선의 노대감님(예 : 藝)에 대한 은혜를 잊지 못하여 조금이라도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묘소자리를 하나 잡아드리기 위해서 찾아왔노라고 했다.

그리고는 이 지방의 산세를 두루 살펴본 결과 천(天)ㆍ지(地)ㆍ인(人)의 삼혈(三穴)이 있는데

천자혈(天字穴)은 3代가 걸식(乞食)한 후 9代가 정승(政丞)을 내고,

지자혈(地字穴)은 萬代 영화와 자손이 화목하게 살고,

인자혈(人字穴)은 부귀는 누리나 자손간에 암투가 있다고 하면서

삼혈이 각각 가지고 있는 부귀영화와 역리설(易理說)을 말하고는 이중에서 한곳을 고르라고 말했고 부원군께서는 사양하셨으나 그 중국인이 물서 서지 않고 끝까지 권하므로 부원군께서는 보자손(保子孫)위주의 지자혈(地字穴)을 택하였다고 전한다.

⚫ 5세 – 휘(諱) 영검(榮儉)

5세 휘(諱) 영검(榮儉)은 4세 구예(具藝)의 장남으로서 초휘(初諱)는 구정(具貞)이다.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중대광전리판서(重大匡典理判書)에 올랐고 선충익찬공신(宣忠翊贊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으며 면성군(沔城君)에 봉군(封君)되었다. 배위(配位)는 죽산안씨(竹山安氏)와 경주김씨(慶州金氏)이며, 장인(丈人)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안규(安珪)와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김자장(金子章)이다.

묘소(墓所)는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봉래리 계좌(癸坐)에 모셔졌으나 남북 분단으로 첨소봉영(瞻掃封塋) 할 수 없어 충남 당진군 송악면 가교리에 모셔진 4세 구예(具藝)의 묘소(墓所) 아래에 망제단(望祭壇)을 세웠다. ♣

⚫ 6세 – 휘(諱) 위(褘)

6세 휘(諱) 위(褘)는 5세 구영검(具榮儉)의 장남으로서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소부윤(少府尹)을 지냈고 장자인 구홍(具鴻)의 귀현으로 삼중대광문하좌정승(三重大匡門下左政丞)과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지이조사(知吏曹事)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과 문정(文貞)의 시호(諡號)를 추증(追贈)받았다. 배위(配位)는 경주박씨(慶州朴氏)이며, 장인(丈人)은 고려(高麗) 보문각태학사문하시랑평장사(寶文閣太學士門下侍郞平章事) 문정공(文貞公) 박세태(朴世泰)이다. 구위(具褘)는 슬하에 아들 5형제와 딸 9자매를 두었다. 장남인 구홍(具鴻)은 좌정승파(左政丞派) 파조(派祖)이고, 차남인 구성량(具成亮)은 판안동파(判安東派) 파조(派祖)이고, 3남인 구성로(具成老)는 도원수파(都元帥派) 파조(派祖)이고, 4남인 구성우(具成祐)는 형조판서(刑曹判書)와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였는데 무후(无后) 되었고, 5남인 구성덕(具成德)은 재신파(宰臣派 – 在北) 파조(派祖)이다.

묘소(墓所)는 경기도 개풍군 남면 율응리 인좌(寅坐)에 모셔졌으나 남북 분단으로 첨소봉영(瞻掃封塋) 할 수 없어 충남 당진군 송악면 가교리에 모셔진 4세 구예(具藝)의 묘소(墓所) 아래에 망제단(望祭壇)을 세웠다. ♣

⚫ 판안동 파조(7世祖) : 휘(諱) 성량(成亮)

판안동공께서는 6세 문정(文貞)공 휘(諱) 위(褘)공과 경주박씨의 둘째 아드님으로 조선조 태조 4년(1395년)에 대장군(大將軍)으로서 豊海道(지금의 黃海道)에 파견되어 근무하였으며 판농시사(判農寺事)ㆍ예조전서(禮曹典書)ㆍ강원도병마사(江原道兵馬使)와 총제(摠制) ㆍ도절제사(都節制使)평안도도안무사(平安道都按撫使)ㆍ판안동대도호부사(判安東大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안타깝게도 실전하여 1904년 당진군 송악면 가교리에 할아버님만 설단(設壇)하여 시사(時祀)는 2011년도부터 음력 3월 2일에 세일사(歲一祀)를 봉행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할머님의 성씨(姓氏)를 실성(失姓)하여 현재까지 족보에 기록하지 못하고 있으며 묘소도 실전하였다. 옛 부터 전해오는 일화에 따르면 판안동 공께서는 고려조의 벼슬아치로서 고려가 망함에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던 중 형님이신 좌시중(左侍中 : 좌정승파 파조 휘 鴻)공 께서는 󰡒 나는 고려의 중신(重臣)이기에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갈 수 없지만 너희는 중신이 아니니 벼슬길에 나가라󰡓는 말씀에 따라 조선조에 출사(出仕)하신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